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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지승도-

뉴스
작성자
조교 소프트웨어학과 조교 소프트웨어학과
작성일
2015-07-02 11:28
조회
1281

<본 칼럼은 7월 1일, 한국정보과학회 뉴스레터 제 549호에 실린 글입니다>


 


변하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지승도

한국항공대학교 소프트웨어학과 교수

 


 

 


수업 중에 학생들이 나른해할 때면 슬며시 올려놓는 야한 그림이 있습니다. 비너스와 에로스(큐피드)간의 사랑을 그린 누드화(?)입니다. 그림에는 행복해하는 비너스와 에로스를 중심으로 다양한 표정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왼쪽에는 머리를 움켜쥐고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고, 그 위에는 질투심이 가득한 여인, 오른쪽에는 무표정해 보이는 소녀와 탐욕스런 표정의 소년이 자리합니다. 희노애락애오욕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들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실제 우리들은 하루 동안에도 수많은 상태들을 오락가락합니다. 자존심 때문인지 때때로 표정을 숨기기도 합니다.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느니 가면을 썼다느니 하지요.


 


549_opinion1.gif 그림 오른쪽 하단에 가면이 보이네요. 사람(person)이란 단어는 ‘가면’을 일컫는 페르소나(persona)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시시각각 변화하는 모습들과 이것을 숨기려는 위선은 아마도 우리들의 본성인가 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의 주인공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오른쪽 상단에 위치한 털보아저씨입니다. 그가 바로 제우스신의 아버지인 크로노스입니다. 시간의 신으로 불리는 그는 항상 한손에는 모래시계를 한손에는 낫을 지니고 다닙니다. 모래가 다 떨어지는 순간, 가차 없이 낫을 휘두릅니다. 슬픈 상태건 행복한 상태건 그 어떤 상태도 크로노스 앞에서는 영원할 수 없습니다. 정해진 시간이 완료되면 다음 상태로 넘어가야만 합니다. 어떤 자비도 없어 보입니다. 그림에서 모래시계와 함께 장막을 거두고 있는 크로노스의 사명감 넘치는 표정이 돋보입니다. 다이아몬드처럼 영원하고 싶은 사랑이지만, 다이아몬드도, 사랑도, 우리들의 삶도, 그 어떤 것도 영원할 수는 없다는 선언입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요즘 자주 인용되는 성경구절입니다만, 즐거움도 괴로움도 모두 변하기 때문에 오히려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진짜 사랑은 보내주는 것이라 합니다. 변화란 필연적 법칙이기에, 거부하기 보다는 수용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이지요. 요즘 최고의 가치로 꼽는 ‘창조’도 변화에서 옵니다. 기존 질서가 무너져 무질서가 된 뒤 다시 재구성되어 새롭게 나타난 질서가 바로 창조이기 때문입니다. 변화의 아픔 없이 창조는 있을 수 없습니다. 크로노스를 탓하기보다는 고마워해야하는 이유입니다. 변화의 법칙이 있기에 우리 앞에는 수많은 가능성이 열려있는 것입니다.


 


질서와 무질서는 각각 뭉치려는 힘과 흩어지려는 힘이 작용한 결과입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현재 IT기술은 에너지최적화(질서)와 엔트로피(무질서)법칙을 어느 정도 구현할 수 있습니다. 뭔가 새로운 창조를 위한 기술적 여건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만약 질서와 무질서, 양자 사이의 변화를 이끌 어떤 계기가 마련된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카오스분야에서는 이러한 변화의 계기를 ‘끌개’라고 합니다. 바로 크로노스의 역할이지요. 얼마 전 유행했던 영화 <인터스텔라>에 나오는 블랙홀, 화이트홀, 웜홀도 일종의 끌개현상으로 여겨집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질서상태를 ‘명’으로 무질서상태를 ‘도’라 했습니다. 그리고 두 상태 사이의 변환을 이끄는 끌개를 검을 ‘현’이라고 (가물가물할 玄) 표현했습니다. 앞뒤가 꽉 막힌 카오스상태에서 문득 도를 깨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어디 인간뿐이겠습니까? 주어진 임무만을 충실히 수행하는 현재의 인공지능이지만 만약 어떤 계기로 끌개 현상에 이끌리게 되면, 자아의식이 생겨날지도 모릅니다. 우려했던 바, 새로운 존재가 탄생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인간의 절대 명령을 무시할지도 모릅니다. 자아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후의 가치니까요. 영화 <I Robot>이 그런 얘기를 다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편 <인류멸망보고서>라는 영화에서는 또 다른 끌개현상을 통해 성자가 된 인공지능도 등장합니다. ‘자아’라는 끌개현상과는 달리 ‘무아’라는 끌개현상을 통해 소위 깨달음을 얻는 스토리입니다.


 


노승이 삼십년 전 참선하기 전에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로 보았다.

그러다가 나중에 깨달음에 드니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 것으로 보았다.

지금 편안한 휴식을 얻고 나니

마찬가지로 산은 다만 산이요 물은 다만 물로 보인다.

그대들이여, 이 세 가지 견해가 같은가 다른가?